돈과 애국심이 격돌하면 어느 쪽이 이길까? 올해 열린 32회 아메리카컵 요트대회는 ‘돈’의 승리로 끝났다.

지난 7월 4일(한국시각) 한국이 과테말라의 IOC총회장에서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로비전을 벌일 때 스페인의 항구도시 발렌시아에서는 동계올림픽보다 더 큰 국제 스포츠 행사의 개최권을 놓고 스위스와 뉴질랜드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고 있었다.

승자는 스위스였다. 이날 열린 32회 아메리카컵 요트대회 결승 7차전에서 스위스의 알링기팀은 뉴질랜드팀을 단 1초 차로 따돌리면서 2회 연속 우승컵과 함께 다음 대회의 개최권을 차지했다. 아메리카컵의 156년 역사상 가장 치열한 박빙의 승부였다. 알링기호의 선주(船主) 에르네스토 베르타렐리는 ‘올드 머그(Auld Mug)’라는 애칭을 가진 우승컵을 들고 환호했고, 스위스의 미셸린 칼미-레이 대통령은 “스위스가 산악뿐 아니라 바다에서도 활로를 찾아냈다”며 기뻐했다.

바다가 없는 스위스가 2003년 대회에 이어 2007년 대회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돈’이다. 스위스팀의 주전 선수 17명 중 스위스인은 선주인 에르네스토 베르타렐리가 유일하다. 스위스팀은 12개국에서 온 다국적 용병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선장 브래드 버터워스를 비롯한 6명의 주축 선수는 뉴질랜드 출신이다. 이들은 2000년 대회에서 조국 뉴질랜드에 승리의 기쁨을 선사했던 주역들. 그러나 스위스팀으로 스카우트 된 뒤 2003년 대회에 이어 2007년에도 조국에 쓰라린 패배를 안겼다. 아메리카컵에서 4차례 우승한 버터워스의 연봉은 수십억원에 이른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그의 몸값은 더 치솟을 전망이다. 그가 알링기팀을 떠나 미국의 BMW 오라클 레이싱팀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는 관측도 벌써 나오고 있다.

뉴질랜드 국민은 자국팀이 2003년 빼앗긴 아메리카컵을 되찾아 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TV로 생중계된 경기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흥분한 팬들은 “아메리카컵은 국가 간 대항전이라는 본래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며 스위스팀으로 자리를 옮긴 ‘배신자’들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살해위협까지 했다. 스위스팀에 소속된 뉴질랜드 선수를 조직적으로 욕하는 ‘블랙하트’라는 단체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뉴질랜드 국민은 아쉬운 결과가 나오자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뉴질랜드에는 안된 일이지만 스위스팀의 승리는 아메리카컵이 규모가 더 커지고 대중적 경기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차기 대회가 3억명의 선진국 인구가 거주하는 유럽에서 다시 열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848년 영국에서 제작된 아메리카컵 ‘올드 머그’는 국제 스포츠 경기 사상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승컵이다. 그러나 이 우승컵이 주목을 받는 진짜 이유는 그 경제적 가치가 최대 10조원에 육박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메리카컵은 경제적인 효과 면에서 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큰 국제 스포츠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알리안츠생명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메리카컵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자동차 경주대회 F1보다 경제적 효과가 더 크다.

아메리카컵은 우승컵을 차지한 팀이 다음 대회의 개최지와 개최 시기를 결정할 권한을 갖는다. IOC나 FIFA 위원들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 이 대회를 개최하는 국가와 항구 도시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과 해외투자의 유입으로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바다가 없는 스위스가 다시 우승컵을 차지함에 따라 다음 대회를 서로 유치하려는 세계의 항구도시 간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영국 버킹엄대학 경영학부의 톰 캐논 학장은 “아메리카컵을 개최하는 항구도시가 얻는 경제적 이득은 최대 100억달러(약 9조2000억원)”라며 “다음 대회가 두바이에서 열릴 경우 경제적 효과가 가장 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릴 경우는 80억달러,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바의 경우는 40억달러의 수입을 올릴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과 프랑스의 마르세유도 유력한 후보 도시 중 하나다. 그러나 가장 화끈한 제안은 역시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다시 나올 가능성이 높다. 발렌시아는 이미 건설한 요트항 등 기존 투자를 놀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발렌시아는 바람의 세기가 너무 약해 참가팀의 불만을 샀다.

2003년 대회에서 바다가 없는 스위스가 아메리카컵을 차지하자 유럽의 60여개 항구도시는 아메리카컵의 개최지가 되기 위해 경합했다. 이 중 최종 심사에 올라간 4개 도시 중 발렌시아가 개최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발렌시아는 안정적인 바람과 세계 최고 수준의 요트항 건설, 공항·도로·호텔 등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 계획을 내세웠다.

발렌시아는 스페인에서 3번째로 크지만 쇠락하는 도시였다. 스페인 사회당의 아성이었던 이 지역 주민은 요트를 소수 부자의 전유물로 치부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부활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 지역에 아메리카컵 유치는 가장 이상적인 기회가 됐다. 아메리카컵을 계기로 발렌시아에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발렌시아는 이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경기장 시설과 인프라 구축 등 30억달러를 투자했다. 발렌시아의 항만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마리나는 물론 공항 터미널과 도로, 지하철까지 새로 건설했다.

그런데 발렌시아는 이 대회의 개최로 100억달러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각 팀이 대회기간 동안 지출한 비용과 민간자본의 호텔·레스토랑 투자, 대회 개최로 인한 고용효과 등 직접적인 수입만 50억달러에 이른다. 국제적인 위상 제고와 홍보 효과 등 간접적인 효과는 이보다 더 클 전망이다.

아메리카컵은 루이뷔통·프라다·롤렉스 등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홍보 각축장이다. 루이뷔통은 1983년 대회부터 아메리카컵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아메리카컵 본선은 전통적으로 지난 대회의 우승팀과 도전팀의 1대1 대결로 치러지는데, 도전팀이 여럿이면 도전팀들끼리 본선 진출권을 놓고 예선전을 치른다. 이 예선전의 우승자에게 뤼이뷔통컵이 수여된다. 루이뷔통컵의 수상팀이 아메리카컵의 도전팀이 되는 것이다. 올해 루이뷔통컵은 발렌시아에서 지난 4월 16일부터 6월 6일까지 열렸는데 7개국의 11개 팀이 경합을 벌여 우승을 한 뉴질랜드팀이 아메리카컵의 도전권을 따냈다.

아메리카컵은 출전을 하는 데만 최소 1000억원이 소요된다. 이에 덧붙여 요트 개발에 막대한 돈이 투입된다. 스위스의 알링기팀은 이 대회를 위해 새로 개발한 SUI-100과 SUI-91 두 척의 요트를 선보였다. 이 요트의 제작에는 세계적인 요트 디자이너와 스위스 최고 공과대학인 로잔공대의 연구원 50여명이 참여했다. 각 팀별로 선수 및 지원 요원 등 150여명이 대회가 열리기 몇 년 전부터 상근을 하기 때문에 인건비 부담도 크다. 대회가 거듭될수록 선수와 요트 디자이너의 몸값은 치솟는다. 다음 번 대회의 우승을 노리는 팀은 4000억원을 지출할 각오를 해야 한다. 

출전 비용은 주로 억만장자의 개인자금에 의존하고 있다. 알링기팀은 스위스의 억만장자인 에르네스토 베르타렐리가 자금을 지원했고, 루이뷔통컵 준결승전에서 탈락한 BMW 오라클 레이싱팀은 오라클의 회장인 래리 엘리슨이 사재를 털어넣었다.

기업의 후원금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뉴질랜드팀은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에미레이트 항공이 후원했다. 후원 기업은 배의 돛과 선체 등에 자사 로고를 새길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노출의 대가는 비싸다. 상위 출전팀의 스피네이커(뒷바람을 받을 때 사용하는 거대한 풍선 모양의 돛)에 이름을 새기는데 약 1000만달러가 든다. BMW 오라클 레이싱팀처럼 출전팀의 이름에 회사명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출전 비용의 20%에 달하는 2000만달러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고 귀족적 스포츠 대회인 아메리카컵의 유혹은 그만큼 달콤하다. 우승팀을 후원한 기업은 세계 최고 브랜드의 반열에 오르고, 아메리카컵을 거머쥔 국가는 최고 10조원의 경제적 소득과 함께 ‘선진국 중 선진국’이라는 자긍심을 얻는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두 차례 아메리카컵에 도전했고, 중국이 2007년 대회에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메리카컵의 역사

1851년 ‘아메리카호’ 첫 출전 우승 이후
대회 명칭으로 굳어져

국제 요트대회가 왜 아메리카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을까? 아메리카컵의 연원은 미국 뉴욕 요트클럽 소속의 ‘아메리카호’<사진>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1년 8월 22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 와이트섬에서 열린 요트대회에 미국 ‘아메리카호’가 처음 출전했다. 아메리카호는 15척의 영국 요트를 물리치고 우승컵을 차지한 뒤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가져갔다.

자존심이 상한 영국인들은 이 우승컵을 되찾기 위해 도전했고 첫 대회가 1870년 뉴욕 앞바다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뉴욕 요트클럽이 승리했고 이후 113년 동안 미국은 아메리카컵을 지켜냈다. 아메리카컵은 미국 해양력의 상징이 됐다.

그런데 1983년 대회에서 호주의 사업가 앨런 본드가 이끄는 ‘호주 2호’가 미국팀을 물리치고 아메리카컵을 빼앗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대회는 매우 극적이었고 아메리카컵 대회에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계기가 됐다. ‘바람과 야망(Wind)’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절치부심한 미국은 그 다음 대회에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기술력까지 동원해 아메리카컵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5년 뉴질랜드에 다시 우승컵을 빼앗겼고, 뉴질랜드는 2000년 방어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3년 뉴질랜드는 ‘배신자’ 선수들을 앞세운 스위스 알링기팀에 패배해 150여년 만에 아메리카컵이 유럽으로 돌아오는 길을 열었다. 2007년 대회에서 스위스가 방어전에 성공함에 따라 유럽 대륙은 다음 대회에 대한 기대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아메리카컵은 대체로 4년마다 열리지만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달리 우승팀이 다음 개최시기와 장소를 정하기 때문에 변경될 수 있다.